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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이야기들

어느 토요일의 에세이

Orthy 2024. 3. 1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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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적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운 것은 펜을 들고 첫 글자를 적는 일이다. 입대 전에도 글을 적던 때가 있었다. 가끔 일기를 썼다. 그마저도 입대 직전 몇 달은 글을 적는 일 없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거나, 여유로운 날에는 혼란에 가득 차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바빴다. 입대 후에는 훈련소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적다 보니 하루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감정과 단상을 기록하기도 하는데, 조금씩 재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어제 읽은 2020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은 나의 글쓰기를 독려한다. 마치 작가라도 된 마냥 글을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편으로는 군대라는 새로운 환경이 내게 준 긍정적 영향에 고맙기도 하다. 다만 일에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내가 언제까지 이 습관을 유지할지 모르겠다.


휴대폰이 없던 훈련소 시절이 버틸만했던 것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하루일과, 짧은 기간임에도 오래 만난 친구처럼 친해졌던 분대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령부에 전속온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도 지루함을 느낀다. 훈련소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그때가 벌써 생각나고 그리워지곤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침에는 아덴만 여명작전을 지휘한 최영함 함장 조영주 대령의 책을 읽었다. 사건에 대한 간단한 개요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책을 통해 자세한 일지를 알게 되었고 또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부대에서 만났던 그리고 앞으로 만날 장교들의 시선을 이해하고 그들의 지시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른바 군대식 문화라는 것에 대해 입대 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공간과 결합되어 기록된다. 어떤 기억에 대해 떠올릴 때면 나는 그 기억이 만들어진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 공간을 맴도는 스스로를 떠올리곤 한다. 또 반대로 어떤 공간에서 대해 생각하면 그곳과 관련된 내 기억들이 재생된다. 공간과 기억이 합쳐져 만들어진 추억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는 많지 않다. 멍하니 군장을 메고 농촌의 둑길을 걷는 훈련소의 행군 시간을 어떻게든 빨리 지나 보내려는 훈련병이 아니라면. 그 기억들과 어제 읽은 책에서 본 글이 합쳐져 오늘의 단상을 만들었다. 책에는 용산이라는 공간에 얽힌 두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 또한 내 삶에 등장하지 않았다가 지난 2년 새 급속히 생활의 중심부로 등장한 용산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만들어진 기억들을 떠올렸다. 내가 지나온 용산의 모든 공간-이를테면 용산역, 이촌, 삼각지, 이태원 같은-과 풍경, 날씨, 사람과 광장의 기억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맛보는 것이다. 귀로는 베이스와 드럼 그리고 일렉기타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빈틈없이 빼곡한 멜로디가 들려와 정신을 아득하게 한다. 모임별의 앨범 '아편굴 처녀가 들려준 이야기' 앨범이 재생되고 있다.


나는 자연스레 시간을 백여 년 거슬러 청나라 말기 상해의 한 아편굴과 그 속에서 현실을 잊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느 몰락한 귀족의 자제는 부모 몰래 빼돌린,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얼마 남지 않은 귀중품을 담보로 융통한 돈을 들고 아편굴로 향한다. 한껏 연기를 들이마시고 잠에 든 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고 미천한 신분의 아편굴 처녀와 이야기 나누는 그 청년을 생각한다. 아편굴 처녀와 청년, 한 쌍의 남녀가 그 순간 누릴 고양감에 대해 생각한다. 또 그러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인생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다만 지금 순간이 영원하길 바랄 뿐일까? 내 인생과 그러한 인생 중 어떤 인생이 더욱 행복한 삶일까? 내가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의 삶을 좋아한다.


나는 참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다. 정해지고 곧게 닦인 길을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앞날에 대한 걱정, 그러니까 더욱 짙고 막막한 안개가 내린 어둠 속으로 향하는 건 아닐지 걱정되어 쉽사리 발길을 내딛지 못하겠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고픈대로 발길을 내딛으면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내게는 용기가 많이 부족한가 보다. 우선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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