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9.15.(월)
전날 다친 엄지발가락 때문에 아침부터 마음이 굉장히 심란했다. 수요일부터는 파미르 투어를 가야하는데, 오래 전부터 기대했던 투어인데도 제대로 걷지 못해 마음껏 즐기지 못할 것 같았다. 마음은 심란했지만 일단 다음 도시로 이동은 해야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발가락에 압박을 주는 등산화 대신 반스 운동화로 신발을 갈아신었다.
떠나기 전에 사밀이 커피와 차를 내려준다고 해서 조금 기다렸다. 커피와 차의 향을 즐기고 마시는 동안, 어차피 다친 상태에서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겠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을 놓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두기로 했다.



사밀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사밀과 함께 집을 나섰다. 너무 감사하다고 몇번이나 인사를 드렸다.
엄지발가락에 부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다보니 절름발이처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배낭을 매고 절뚝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우스워보였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밀에게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고맙게도 사밀도 나 덕분에 재밌었다며 장문의 글을 번역기로 보여줬다. 그러면서 옥팔찌라며 팔찌를 건넸는데, 정말 고마워 그 뒤로 계속 하고 다니고 있다. 나도 줄 게 없을까 했는데, 이 친구가(사실 키르기즈스탄 사람들이) 한국 사극을 좋아한다고 하던게 생각나서 가방에 달고 다니던 전통문양매듭?키링을 줬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버지 차를 타고 터미널을 가는 길에 가방에 달겠다며 가져온 키링이었는데, 사밀에게 선물할 줄은 그땐 상상도 못했다.
한국 사극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밀과 이야기해보니 키르기즈스탄 사람들에게 한국 드라마가 여전히 굉장히 인기있고, 현대배경보다도 사극이 훨씬 인기있다고 했다. 사극이라고 하기 민망한 퓨전코믹드라마에 사극을 한 스푼 넣은 철인왕후가 엄청 인기있었다고 했고, 최근 방영하는 폭군의 셰프도 무척 인기있다고 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보보경심려라고 했는데 이건 나도 봤어서 이야기를 조금 했다.
여기 사람들은 보통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러시아어로 더빙된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했는데, 정식 수출 경로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중간에 더빙하면서 대사가 이상하게 변질되지만 않는다면 긍정적 효과가 크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정식 수출이 된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한 시청은 한국 사람들도 많이 하는거고... 한국 문화를 알리면 좋은 것 아니겠나, 생각을 한다.
바자르 쿠르간에서 30분만 마슈르트카를 타면 잘랄아바드에 도착한다. 원래는 잘랄아바드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르다 오쉬에 갈 생각이었는데, 가는 길에 사밀을 만나서 너무나 아름다운 아슬란밥 마을도 구경하고, 작은 마을 바자르 쿠르간의 생활도 체험해본데다 키르기즈스탄 현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잘랄아바드 구경을 해보고 싶긴 했는데, 후기를 찾아보니 볼 게 없다는 말이 많았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거다. 사밀에게 너무 고맙다.
마슈르트카는 잘랄아바드 버스터미널에서 내릴 수 있다. 바로 옆 플랫폼에 오쉬로 가는 마슈르트카가 있다. 키르기즈스탄 북부(비슈케크와 이식쿨의 도시들)에서는 마슈르트카를 탈 때 기사님께 직접 돈을 냈다면, 남부에서는 터미널 매표소에서 마슈르트카 티켓을 직접 구매하고 내릴 때 기사님께 영수증을 제출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잘랄아바드에서 내릴 때는 영수증을 냈지만, 오쉬에서 내릴 때는 또 영수증 검사를 하지 않았다. 검사도 랜덤으로 하는건지 모르겠다.
잘랄아바드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사밀과 작별을 하고, 학업에 행운을 빌어준 뒤 오쉬행 마슈르트카 티켓을 구매했다. 가격은 220솜. 얼른 자리에 앉았고, 내가 탔을 때는 5명 정도 앉아있었는데 10분도 지나지 않아 마슈르트카가 가득 차 출발했다. 잘랄아바드에서 오쉬까지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가는 길에 블로그 여행기를 작성한 뒤 오쉬 시내의 병원에 대해서 계속 검색해보았다.
병원에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키르기즈스탄의 의료체계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내 상처는 봉합이 필요할 정도로 큰 것이 아니라 간단한 드레싱을 받으면 될 정도라고 판단했다.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이유도 컸다. 그렇지만 다행히 블로그 후기에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어 알아본 결과 많이 나와봐야 4~5만원 수준이었다. 그래서 체크인 시간까지 3시간이 있는데다가, 여행자보험도 가입해 두었고, 곧 파미르 투어도 가야하니 진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미널에서 병원까지 경로를 찾아봤는데 마침 내가 예약한 숙소가 오쉬 시립병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였다. 안 갈 이유가 더더욱 없어졌다.
그렇게 병원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11시가 좀 넘은 시각에 파미르 여행의 시작점 오쉬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오쉬에 도착하니 감격할 줄 알았지만 신경이 온통 발가락에 쏠려있어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ㅠㅠ)



터미널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오쉬 시립병원까지 갔다. 터미널 바로 앞에 정류장이 있어 걸음 불편한 내게는 행운이었다.


오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비슈케크만큼이나 활기 넘치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이슬람 색채가 무척 강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도시라 그런지 이슬람의 향취가 옅었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도 많이 보이고, 굉장히 자유로워 보였다 - 나중에 알았는데, 바로 근처에 오쉬 사립대학교가 있고 각종 정부기관이 몰려있는 비슈케크의 알라투 광장과 비슷한 거리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오쉬의 풍경을 뒤로하고 평소라면 5분이면 갔을 거리를 훨씬 더 걸어 겨우 오쉬 시립병원에 도착했다.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서 상처를 보여줬더니 의사가 이리저리 보시고는 드레싱을 하러 가자고 했다. 구소련권에서는 의학을 러시아어로 공부한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의사조차도 영어는 거의 못했다. 통역기로만 계속 대화를 했는데, 이상하게 번역되어도 그냥 알아들은 척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은 한국의 병원과 크게 다를게 없어 보였다. 컴퓨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있었겠지? 의사의 옷차림도 한국과 거의 똑같아서 재밌었다.

번역기가 잘 안돼서 몇 번씩이나 같은 말을 다시 말해야해서 귀찮았을텐데, 싫은 표정 한 번 없이 말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말 안통하는 외국인한테도 신경을 잘 써준 것 같았다.
진료가 끝나고 드레싱을 받으라고 했는데, 드레싱룸으로 가라고 하는게 아니라 직접 나를 데리고 드레싱룸까지 가주셨다. 헉, 너무 고마운데? 싶었는데 원래 드레싱을 간호사한테 맡기지 않고 직접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드레싱을 받고 처방전을 써줬다.

인터넷에서 러시아어 필기체로 쓴 처방전 짤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에 비하면 이 처방전은 꽤 신경써서 쓴 것 같다.
드레싱을 받으니 드레싱 요금을 추가로 내라고 했다.

병원비가 굉장히 싼 것 같았다. 보험 같은게 없을 텐데도 이정도면 상당하다. 상처가 가벼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진료를 받고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했다. 겨우 160솜 정도라 2500원 정도? 약값도 굉장히 싸다.
할 일을 다 끝내니 12시 반 정도였다. 숙소 체크인을 2시부터였는데, 햇볕은 뜨겁고 가방은 몽땅 챙긴 채로 밖에서 있을 데도 없어 어떻게든 비벼봐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숙소로 갔다. 역시 평소엔 10분이면 갔을 거리를 절뚝거리면서 한참 걸어갔다. 병원에서 해준 드레싱은 또 무척 두꺼워서 신발에 꽉 끼어 아팠다. 신세를 한탄하며 걸어갔다.


파미르 투어 집결지와 가까우면서도 평이 좋아 선택한 ABS 호스텔 오쉬. 감사하게도 그냥 일찍 체크인을 해줬다.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워서 쉬다가 2시 반쯤 배가 고파져서 나왔다. 파미르 여행을 위해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해서 웬만하면 걷지 않으려고 했는데, 밥은 먹어야해서 일단 나갔다. 오쉬에 왔는데 시내 구경도 못하고, 투어를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되어서 마음이 계속 심란한 상태였다.

그런데 돌아다녀도 근처에 식당이 안보였다. 식당은 있는데 먹을만한 식당이 안보였다. 다 혼자 들어갈 분위기가 아닌 식당들이었다. 그래서 20분정도? 걷다가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해서 살았다, 하고 들어갔다.

콜라를 먹을까 했는데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전날 과일에 아이스크림으로 당도 과다 섭취해서 환타도 먹을 수 없었다. 결국 음료는 시키지 않고 치킨버거와 치킨롤을 시켰다. 각 170솜, 200솜이어서 총 370솜, 6000원 정도? 왜 치킨롤이 더 비싸지? 의문스러웠는데 일단 시켰다. 점원이 주문 받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국말로 인사를 해서 나도 또 안녕하세요, 했다. 맛있는 것 먹을 생각에 신나서 기분이 좀 좋아졌던 것 같다.
그런데 음식이 좀 늦게 나온다. 패스트푸드는 아니고 그냥 푸드... 한 20분 기다려서 음식을 받았다.


배가 조금 덜 차 치킨롤도 먹었다. 그런데 치킨롤 이거 엄청나게 묵직해서 거의 내 팔뚝만한 길이에 굵기도 꽤나 실했다. 버거보다 비싼 이유가 있었어.


오쉬에 간다면 오쉬 시립병원 근처 Токоч, 추천합니다. 맛있게 먹었다.
슈카월드를 보면서 치킨롤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남자 점원이 와서 내게 쪽지를 줬다.

엥?엥? 남자가 왜 나한테 이걸? 하면서 물음표 띄우다가 다 먹고 나가면서 그 직원을 찾아가서 이게 뭐냐고 물어봤는데 번역기로 어떤 소녀가 당신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러길래 더 띠용했다. 처음에 인사한 점원이 한국인이라고 알려준건가? 그래서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나보고 이 번호로 연락하라고만 하길래 그냥 나왔다. 연락할 생각은 없지만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시 숙소로 한참 걸어서 돌아왔다. 숙소에 들어와서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수학 공부를 했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할 게 있어 다행스러웠다. 아무데도 안나가고 공부하다가 유튜브를 봤다. 일단 최대한 회복을 하고 싶어서 계속 숙소에만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은 계속 심란했다. 와중에 같이 파미르 투어를 가는 한국분을 같은 숙소에서 우연히 만나서 상처가 나서 고민이 깊다면서 이야기하다보니 조금 기분이 나아져서 그대로 잠에 들었다.
25. 9.16.(화)
아침에 일어나도 할 게 없어서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뭐라도 먹으려고 식당에 나왔는데 그 한국분을 또 만났다. 이분이 오랫동안 여행을 하시는 분이라 응급처치키트가 훌륭해서 함께 드레싱을 갈았는데, 확인해보니 상처가 확연히 좋아졌다. 살이 많이 붙고 고름도 없는데다가 육안으로 봐도 좋아진게 느껴졌다. 너무 기분좋고 다행스러웠고 통증도 없어 조금 걸어도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상태가 좋아 그냥 오쉬 시내를 조금 돌아다니기로 했다.
숙소를 나서 오쉬의 명물 슐레이만 산으로 향했다. 솔로몬 왕이 오랫동안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쉬의 자랑이라고 했다.





슐레이만 산으로 입장료는 70솜이었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매하고 입장한다.

전망대까지는 1키로 정도 걸어가면 된다.



딱히 구경할만한건 없다. 오쉬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조금 있다가 바로 내려왔다.
환전을 하기 위해 시내 중심가로 걸어갔다. 타지키스탄 소모니로 환전을 해야했는데, 은행에서는 소모니를 취급하지 않고 사설 환전소에서만 사악한 수수료와 함께 소모니를 취급한다고 들었다.

구글에서는 1달러당 9.45소모니라고 했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녀봤지만 가장 좋은 환율이 1달러당 8.90소모니였다. 일단 파미르 고원에 들어가면 환전을 할 수 있긴 하지만, 환전소가 있는 큰 마을인 무르갑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소모니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100달러를 환전해 890소모니를 받아왔다. 큰 돈은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다는게 문제다...
환전을 하고 글로버스에 들러 앞으로 필요할 생필품들을 구매하고 숙소쪽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샤슬릭 가게를 발견해서 들어갔다. 고기완자 샤슬릭이었는데, 한 꼬치에 겨우 70솜밖에 안했다. 비슈케크에서는 같은 걸 200솜 넘게 받을텐데. 남부 물가가 확실히 저렴하다.



발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내 구경은 이쯤에서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와서는 씻고, 빨래를 하고 공부하다 휴대폰 보다가를 반복했다.
파미르 하이웨이로 가는 길에 글을 쓰고 있어 이번 여행기는 조금 분량이 적다. 실제로 한 일이 많이 없기도 하지만.
앞으로 한동안 글을 못 올린다. 파미르 여행이 끝나면 한 번에 글을 올릴 생각이다. 벌써부터 도로 주변의 경치가 대단하다. 너무너무 설레고 기대되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