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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이야기들/[ ]를 보다

[어쩔 수가 없다]를 보다

by Orthy 2026. 2. 4.

No other choice, 26. 2. 2.

박찬욱, 2025

오랜만에 돌아온 영화 리뷰 글.

5개월의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여행 기간 중 몇몇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들이 개봉했고, 직접 볼 수 없는게 아쉬웠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는 그 중 가장 보고싶던 영화였다.

박찬욱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기대, 이병헌 / 손예진 등 화려한 배우진까지.

여행 기간 중 의도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일체의 콘텐츠도 소비하지 않았다.

넷플릭스에 영화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가족 계정은 해외에서 접속이 불가능해 거의 한국에 오자마자 영화를 봤다.

감상은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하다.

역시 박찬욱이다.

박찬욱 영화에서 항상 기대하게 되는 빼어난 미장센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훌륭하다. 가끔 색이 유독 튀는 느낌 - 비현실적인 색감이라고 해야할까? - 이 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의도적인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다.

이병헌의 과장된 연기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블랙)코미디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간 이병헌이 보여준 연기를 생각하면, 영화에서 보이는 그의 연기가 전적으로 박찬욱의 디렉팅을 따른 결과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줄거리는 자칫 진부하고 의문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메타포와 상징이 훌륭하다. 느끼지 못했던 / 캐치하지 못했던 부분이 많은데,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 영상과 단군의 관람 후기를 보며 새로 알게된 것이 많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된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제지(製紙)회사 '태양 제지'의 관리자로 근무하던 만수(이병헌 扮)가 25년째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된 뒤, 위기에 빠진 가정을 구하기 위해 재취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만수는 '태양 제지'의 경쟁사이자 저물어가는 제지 산업에서 해외 진출을 통해 활로를 찾은 '문 제지'의 관리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선출(박희순 扮)을 죽여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밝게 떠오른 태양 아래, 높은 건물 옥상에서 무거운 화분을 선출의 머리 위로 던져 살해하려는 순간

선출이 죽더라도 만수보다 능력이 뛰어난 경쟁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잠재적 경쟁자를 찾고 그들을 제거한 뒤 최종적으로 선출을 제거해 '문 제지'의 관리자 자리에 재취업하기 위해, 만수는 페이퍼 컴퍼니 '레드 페퍼 제지'를 만들고 채용 공고를 게시해 '펄프맨'들의 이력서와 신상을 모은다.

그 결과 범모(이성민 扮)와 시조(차승원 扮)만 제거하면 됨을 깨닫고,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만수는 범모와 시조, 선출을 차례로 제거한다.

범모와 시조는 만수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일뿐 아니라

만수의 인간적인 - 어쩌면 나약하다고 말해야 하는 -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그의 일부이기도 하다.

경쟁자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만수는 그의 나약함 - 혹은 인간성 - 을 하나씩 제거한다.

범모가 죽은 뒤 만수에게서는 '범모의 모습'이 사라진다. 시조를 제거한 뒤에는 만수에게서 '시조의 모습'이 사라진다.

일련의 과정을 이 은유에 기초해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영화가 비로소 온전히 다가온다.

이걸 느끼지 못한 채 영화 관람을 끝냈을 때는 불편한 부분들,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이 너무 많아 도대체 이 영화는 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헷갈렸는데

몇 개의 리뷰를 보고 다시 생각하니 의문점이 해결되고 장면 하나하나가 다시 떠오르며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된다.


진짜 잘 만든 영화다. 난 무척 좋다. 이른 시일 내에 한 번 더 볼 생각이다. 박찬욱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재밌게 보지 않을까.

별개로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오지 못하는 한국 영화계의 제자리걸음이 슬프기만하다. 몇몇 감독의 천재성에 기대어 쌓아 올린 한국 영화 산업이라는 탑이 무너지기 직전이다. 양산형으로, 돈이 되는 - 것으로 믿어지는 - 영화들만 찍어내고 있다. 티켓값이 비싸다는 것도 문제지만, 볼 영화가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한국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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